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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걸작선] 화분
2018-06-09 | 더 큰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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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현대사에서 이른바 유신 체제로 대표되는 1970년대는 표현의 자유가 극도로 억압된 시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금지곡이 양산되고 영화는 일상적으로 검열을 당했던 시대죠.

그렇다고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시도한 영화인들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닌데요.

그 가운데 한 명이 한국인 최초로 미국 UCLA에서 영화를 공부한 하길종 감독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화분'이라는 작품은 그의 데뷔작인데요.

당시로선 상당히 파격적이고도 실험적인 형식 안에 당대의 독재 권력에 대한 은근한 비판을 가미했습니다. 지금, 만나보시죠.

세란은 하나뿐인 혈육, 여동생 미란과 함께 현마의 첩으로 살고 있습니다.

세란 : 난 너희 형부가 너를 아끼고 돌봐주는 것으로 만족을 느끼고 있어.

세란 : 미란아.

미란 : 언니.

세란 : 미란이는 나의 전부야.

너만은 훌륭히 자라야 해.

별장 소유주인 현마는 어느날 젊고 잘생긴 새 비서 단주를 데리고 옵니다.

현마 : 내가 새로 고용한 비서야. 서단주라고 말야. 어, 인사하지 그래

단주 : 처음 뵙겠습니다. 서…

미란 : 형부, 음악회 구경시켜주신다는 거 어떻게 됐어요?

처음 만난 자리에서 미란에게 민망한 무시를 당한 단주.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있어도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미란은 때늦은 첫 생리를 들켜 웃음거리가 되고 맙니다.

세란 : 우리 미란이가 왜 여태 그게 없나 하고 걱정했더니만.

세란 : 여보, 오늘에야 비로소 어른이 됐지 뭐예요.

망신살이 단단히 뻗친 미란은 홧김에 집을 나가 버리는데요.

현마는 비서 단주에게 미란을 다시 데리고 오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미란은 자신을 뒤쫒아온 단주를 여전히 차갑게 대하는데요.

미란 : 뭔데 자꾸만 날 따라오는 거지? 하인이나 된 것처럼.

단주: 하인?

미란 : 그럼 하인이 아니고 뭐냔 말이에요?

계속해서 단주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미란.

어쨌든 이걸 계기로 두 사람은 함께 있게 되는데요.

모처럼 답답한 현마의 별장에서 탈출한 미란은 단주와 함께 해방감을 만끽합니다.

난데없이 비가 쏟아지고, 두 사람은 근처 불도저 속으로 급히 몸을 숨깁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묘한 교감을 나누게 되죠.

단주 : 젊은 사람이면 누구나 불만의 모든 것들을 밀어 버리는 불도저가 되고 싶지 않을까? 미란이는 잘 자랐으니까 이해를 하지 못하겠지만

미란 : 모르겠네요.

단주 : 알 필요 없어. 미란이처럼 온실에서 자란 여자는.

미란 : 하지만 알고 싶은데요?

이렇게 두 사람은 하룻밤을 같이 지내고 되고 어느새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합니다.

다음날 미란이 집으로 돌아오자, 세란은 동생에게 현마는 비서 단주에게 분노를 드러냅니다.

미란 : 어쩌면 우리를…

세란 : 이런 바보! 뭐? 우리라고?

세란 : 아니 너 그따위 쓰레기 같은 사람을 보고 우리라고 얘기할 수 있어?

현마 : 난 분명히 말했다. 넌 나 하나로 만족할 수 있어. 그리고 말이야. 출세도 나의 손에 달려 있단 말이야.

이 대목에서 하길종 감독은 당시 한국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편집 기법을 선보이는데요.

네 인물의 모습을 교차로 보여주면서 계층 간 갈등과 깊은 불신의 골을 강조합니다.

이런 실험적 편집은 이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데요.

단주와 미란이 버스 터미널에서 만나는 장면에서도 안내 방송을 활용해 이들의 혼란스러운 심리를 드러내고 있죠.

어쨌든 이렇게 단주와 미란은 현마의 손아귀로부터 달아나는 선택을 합니다.

본노와 질투심에 사로잡힌 현마는 이들의 행적을 집요하게 뒤쫓기 시작하죠.

바닷가에서 자동차로 단주를 추격하는 이 장면도 현마의 광기 어린 심리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 '화분'은 두 자매가 사는 현마의 별장을 '푸른 집'이라고 부르는데요.

이 푸른 집에서는 화려한 파티가 열리는 동시에, 인물들의 욕망이 엇갈리고 충돌하는데요.

한국 최고 권력가의 거처인 청와대를 노골적으로 은유하고 있는 설정입니다.

하길종 감독은 또 이 집의 소유주인 현마를 분열증적이면서도 폭력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현마는 당대 민중을 상징하는 단주에게 사회적인 성공을 약속하면서도 그의 자유를 억압합니다.

이 또한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 대한 우회적이고도 상징적인 비판으로 해석될 여지를 남기죠.

단주 역할을 맡은 하명중은, 하길종 감독의 친동생입니다.

고 여운계 선생이 핍박 당하는 하층민을 상징하는 이 집의 가정부 옥녀로 나와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미국 유학 시절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등 당대 할리우드의 유명 감독들과 교류한 하길종 감독은, 귀국한 이후 억압적인 정치 상황에 짓눌려 있던 70년대 한국영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어주었습니다.

하길종 감독은 그러나, 1979년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불우한 시대에도 용감한 실험 정신과 비판 의식을 동시에 보여준, 영화 천재의 야심찬 데뷔작. '화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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