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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혐오 집회 맞서 싸운 재일동포 1세 할머니
2019-01-02 |
조회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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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조 양 엽 / 재일동포 1세 (81세)]
"저는 재일동포 1세 조양엽 입니다."

1. 징용 끌려온 아버지, 치마저고리 입던 어머니

"아버지가 징용으로 일본에 왔어요. 근데 5년 뒤 한국에 돌아갔어요. 조선에. 그렇지만 생활이 안 되는 상태였죠. 그래서 아버지가 일본에 다시 돌아온 거예요. 다시 돌아와서는 가족을 일본에 불렀습니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제가 생긴 거예요. 제가 생겼어요. 그리고 태어난 뒤로 일본에 오기까지 절차만 6개월이 걸렸어요. 태어난 곳은 전라남도 순천. 어릴 적에는 아버지가 일본에서 시골에서 자리 잡아 가지고 사는데 시골 사람에게 산을 나눠요. 숯도 굽고 팔러 가고. 장작도 깨서 묶어서 팔러 가고. 아버지는 아침 도시락 싸서 산에 가시면 항상 제가 아버지를 따라갔어요. 아버지를 따라서 산에 갔어요. 어머니가 어딜 가더라도 치마저고리였고 일본어도 전혀 모르고 하니까 친구가, 일본에는 친구가 없으니까 말도 못 배웠겠죠. 그거야말로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였죠. 제가 1학년 끝날 때쯤이었을까요? 전쟁이 끝났어요. 전쟁이 끝났더니 '조선인들이 귀국해서 집이 비어있다'고 그래서 그 시골에서 살 때는 친구 형님 동생이 가까이 있었어요. 그 친구하고 친구 집안하고 우리하고 같이 이사 갔어요. 이사 가서 한 지붕에서 집이 2채 정도가 있었어요. 이쪽 출입구가 있고 해서. 말하자면 *나가야 예요. 일본에서 말하는 나가야, 2채 집이 있었어요. 거기에서 살았죠. (어머니는) 언제나 아버지와 싸웠어요. 근데 언제나 아버지는 엄마에게 화낸 적이 없어요. 화낸 적도 없고 어머니가 뭘 말해도 '어허~!' 하실 뿐이고 말을 안 해요. 그리고 일 안 하실 때는 어머니에게 소설을 읽어줬어요. 연애소설 같은 걸 읽어주는 거예요. 한글도 공부했을지도 모르지만 뭐 어머니는 잘 몰랐거든요. 글을 읽을 줄 몰랐어요. 아버지는 전부 읽어주는 거예요. 어린 마음에 아버지는 상냥하구나, 대단하다. 생각한 적이 있어요. 식사할 때도 아버지와 함께하고. 옛날에는 상이 별개로 있었어요. 큰 상에는 어린애들이 앉았고 아버지만 따로 차려서 드시잖아요. 저만 아버지 옆에서 같이 먹었어요. 아버지가 중간에 밥을 덜어서 저한테 주면, '와 아버지 밥은 참 따뜻하다.' 어린아이 밥이란 게 먹는 도중에 식어버리잖아요. 아버지 밥은 많으니까 따뜻하죠. 아버지 밥은 참 따뜻하다고 생각하면서 먹은 기억이 있죠. 아주 상냥한 신사 같은 아버지였어요.

2. '마늘 냄새' '조센징' 상처가 된 차별의 기억

"어느 날은 한 남자애 집, 굉장히 크고 좋은 집이었어요. 굉장히 부잣집 아들이 절 괴롭히는 거예요. 조센징! 조센징! 하고. 근데 조센징은 김치 먹으니까 힘이 세구나? 마늘 냄새는 나지만. 마늘 냄새라든가 김치 같은 거 먹으니까, 하고 남자애가 괴롭혔어요. 지금도 요리 방송 같은 데서 마늘을 볶는다거나 할 때 출연자가 마늘 향기 좋다고 하면 '지랄병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나 마늘 냄새 난다고 말해놓고 지금 마늘 볶으면 좋은 향기 난다고 하고. 지금도 생각나요. 제가 길에서 만나서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해도 선생님이 반응이 없었어요. 그러면 제가 이 선생님 내가 조선인이라서 무시하는구나 하고 속으로 꼬이게 되는 거죠. 반년 정도 학교 다녔나? 어느 날 등교 거부했어요. 학교 안 가겠다고. 학교가 싫다고 안 가겠다고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그래도 배우면 내 것이 된다. 학교 안 가면 안 된다. 학교에 가라.' 그렇게 아버지가 말하는 거예요. 학교에 가게 하려고 다 해주셨는데 어머니가 '아유 가기 싫거든 가지 마라!' 제 편이 생겼다고 생각해서 좋아하지만, 평소에는 아버지를 좋아하지만 아버지는 학교에 가라고 가라고 하는데 엄마는 안 가도 된다고 하니까 '계집애들 학교 안 가도 된다. 집에서 일 잘하고 살림만 잘 살면 되지. 공부는 해봤자 시집 못 간다.' 라나 뭐라나 해서 학교에 안 가게 됐어요.

3. 일본에서 '한국어 공부'가 가장 쉬웠던 소녀

"전쟁 끝나고 조선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거나 했는데 조금 정돈된 뒤에야 (조선학교에?) 네, 조선학교에 가게 되었어요. (그건 야마구치에서?) 네. 학년으로 말하자면 2학년 조금 지났을 때네요. 제가 그 학교 안 가게 돼서. 학교 안 가게 되고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근데 어머니도 학교 안 가도 된다고 하니까 계속 집에 있었어요. 그러다 조선학교에 가게 됐어요. 그 조선학교가 우리 집에서 산 하나 넘어서, 산 하나 넘어서 어린이 발로 걸어서 한 시간 반 정도. 네 멀죠. 거기에 있는 학교에 다녔어요. 예전에는 마차가 있었어요. 마차에 짐을 쌓아서 사람들이 가잖아요? 그럼 마차 뒤를 쫓아서 뛰는 거예요. 아무도 없었다면 뛰는 의미도 없었겠죠? 재미없어요. 근데 말이 다그닥, 다그닥 달려가니까 같이 따라가면서 학교에 다녔어요. 그때 한글을 배웠죠. 그때 한글을 배웠는데 제가 어릴 때 어머니가 일본어를 모르니까 한글, 그러니까 한국어, 조선말로만 말했어요. 그러니까 말을 알았어요. 말을 아니까 글자는 금방 알게 됐어요. 제가 글자 외우는 게 가장 빨랐어요. 모두 일본어밖에 모르고 한글, 한국말을 몰랐거든요. 어머니랑 다 일본어를 하니까. 그리고 어머니도 일본 기모노를 입고서 일본인처럼 살던 사람들이니까. 그런 사람들이 일부분 조선학교에 섞여 있으니까 그런 집 애들은 글을 알기 어려웠죠. 말도 배워가면서 글도 배워야 하니까. 저는 말을 할 줄 아니까 글 외우는 건 간단했죠!


4. 우리 말을 할 줄 안다는 것, 동포를 위해 산다는 것!

"(근처에 한국인, 조선인이) 많이 있었어요. 그때 남편이 북에 돌아가겠다고 말해서, 통일이 오면 금방 하나가 되니까 북에 가겠다고 말했을 때 제가 일본에서 태어나서 자라서 가와사키밖에 몰라요. 이 시골밖에 모르니까 그러니까 도쿄에 가면 도쿄타워가 그즈음에 생겼다고 하길래, 하늘에 전차가 달린다거나 (모노레일 말이죠.) 그런 걸 좀 보고 천천히 북에 가고 싶어요. 이렇게 서둘러서 안 가도 된다고. 북조선으로 돌아가면 북조선 사람이 '일본은 어떤 나라입니까?' 하고 물어봤을 때, 제가 말할 수 없으니까 도시도 제 눈으로 보고 싶다고 했죠. 도쿄타워면 도쿄타워, 요코하마면 유명한 요코하마도 보고 싶어서 가와사키에 이렇게 더 있겠다고 한 게 가와사키에서 고생하며 살게 된 계기가 된 거죠. (국적을) 민단으로 바꿨죠? 그랬더니 그때 민단의 부인회 회장이 저한테 민단의 일을 도와달라고 그렇게 말했어요. 근데 제가 바로 대답을 안 하니까… 전 사실 도와주려고 했어요. 도와주려고 했는데 바로 '예, 하겠습니다.'는 못하죠.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 남편에게 상담했더니, '자네는 배운 건 없지만 그만큼 한국어 할 수 있고, 그만큼 한국어를 쓸 수가 있고, 가와사키 부인회를 도와주려면 자네 만한 사람이 딱 맞는다고, 도와드리라고.', '아줌마들 한글도 모르는데 일본말도 서투른데 조직을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하고 계신데 도와드리라고.' 그렇게 말했어요. 그렇게 말하기도 하고 한국에 언젠가 수해가 나서 굉장히 큰일이 난 적이 있었어요. 그걸 도와주거나 그래서 제가 부인회에서 역할을 한 거죠. 부인회에서 역할을 하면서 계속 총무부장, 부회장, 회장, 10여 년 계속 부인회 했어요. 부인회 역사 굉장히 오래됐어요. 정말 죽기 살기로,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회장도 했고. 지금은 고문이지만요. 회장이 끝나고 할 일이 없더라고요.

5. '치마저고리' 할머니, '차별 반대 시위' 선봉에 서다

"(최근 몇 년 동안 차별이 더 심해졌나요?) 그런 것 같아요. 예전에는 마치 한 계급 아래 사람처럼 취급당하긴 했어도 지금처럼 심한 상황은 없었어요. 지금 가와사키에서도 차별 혐오 시위하는 사람들은 가와사키가 고향인 사람은 별로 없었다더라고요. 멀리서 이런 거(인터넷) 이용해서 사람 모아서 했다더라고요. 가와사키 역 주변에서부터 시작한 거죠. 가와사키는 재일한국인이 많으니까. 재일한국인이 많으니까 그 사람들 나가라고. 가장 앞에 서서 치마저고리 입고 이런 마이크 달아서 차별 집회를 그만두라고 외치면서 참가했어요. '왜 우리가 헤이트, 헤이트 스피치를 당해야 하느냐고, 당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 생각이 있어서 (시위에도) 참가했어요. 참가할 수밖에 없었죠. 이 헤이트 스피치를 어떻게든 멈추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 생각뿐이었어요. 무섭지 않았어요. 그리고 사쿠라모토(재일동포 마을) 입구 쪽에서 차별 혐오 시위에 반대하는 사람들, 청년들이 양 갈래 길목에 바리케이드 치고 사쿠라모토 상점가에는 절대 발도 못 들이게 도로에 쫙 누웠어요. 그 사람들도 일본사람이에요. 그런 사람들도 있어요. 손잡고 도로 위에서 전부 누워서 막았죠. 그 사람들은 고맙죠. 물론 이렇게 헤이트 스피치를 용서하면 안 된다고 하는 단체도 있지만… 정치인들은 일부러 이런 상황을 보지 못한 척하는 게 있잖아요. 차별에 반대한다고 말은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 짓 해선 안 된다고 하거나, 법을 어겼다 해서 '잡아가진 않죠?' 그렇죠? 그러니까 정치인도 나중 일처럼 여기는 건 안타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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