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정리] 조선의용대의 시작 - 분단이 지워버린 항일투사들 1부 몰아보기
[해설]
한반도를 넘어 중국 대륙까지 삼키려는 일제
그들에 맞선 최정예 항일 독립군
숱한 역경에도 조국 독립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청년들
그들의 이름은 조선의용대!
그러나 해방 후 분단과 이념 대립의 비극 속에서
그들은 남에서도, 북에서도 잊히고 지워졌습니다.
중국 대륙에 남은 불굴의 항일 정신을 찾아 지금 출발합니다.
1. 조선의용대의 시작
중국 후베이 성의 성도 우한.
바로 이 도시에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아주 중요한 유적지가 있습니다.
[인터뷰: 김태빈 / 한성여고 문학 교사]
선생님. 저희들이 지금 아주 중요한 장소에 와 있습니다. 뒤로 보이는 곳이 1938년 10월 10일에 조선의용대가 창립된 장소에 저희들이 와 있는데요
[인터뷰: 김해양 / 김학철 선생 아들]
의용대가 창립했을 당시에는 여기가 대공중학교였거든요.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 신해혁명이 시작한 곳이거든요. 그러니까 의용대원들이 아마 그 의미를 따서 여기를 선택한 것 같아요.
2. 약산 김원봉 장군과 조선의용대의 결성
[인터뷰: 김태빈 / 한성여고 문학 교사]
약산 김원봉 장군은 1919년에 의열단을 만들어서 20년대 아주 꾸준히 의열투쟁을 이어왔고요. 1932년 난징에서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만들고 이것을 지도하기 위해서 1935년에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한 다음에 드디어 중일전쟁 시기에 이곳에서 조선의용대라는 군대를 조직했는데,
[인터뷰: 김해양 / 김학철 선생 아들]
처음 국민당 정부가 공식적으로 승인한 정규화 된 항일 무장대오가 탄생했다는 이것이 아주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3. 조선의용대의 구성원
[인터뷰: 김해양 / 김학철 선생 아들]
중국의 최고 군사 학부, 군사 학원인 황푸군관학교 여기를 졸업한 거의 백 명의 우리 민족 청년들이, 열혈 청년들이 모여서 그 백여 명, 그 외의 사람들까지 백여 명이 여기서 조선의용대를 구성했는데 사실 이 대부분 사람들이 군관이에요.
-군관이라는 말은 지금으로 하자면 장교.
-그렇죠. 장교
-일반 사병부대가 아니라 부대원 거의 대부분이 다 장교로 이루어진
-그렇죠. 전부가 장교예요.
4. 조선의용대의 활약
[해설]
이곳에서 창립된 조선의용대는 시시각각 대륙의 중앙부를 침략해 들어오는 일본군이 우한을 함락하기 직전까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용맹함을 떨쳤습니다.
[인터뷰: 김해양 / 김학철 선생 아들]
그 당시 일본군이 이 무한(우한)을 함락시키는 그 전야에 우리 의용대는 끝까지 잘 싸웠거든요.
[해설]
이역만리 중국 대륙의 한 가운데서 조국 독립을 실현하기 위해 창설된 정예 부대 조선의용대.
[인터뷰: 김해양 / 김학철 선생 아들]
우리 항일하려는 청년들이 여기서 피 끓는 투쟁을 하였고 또 이 무한(우한)이 함락되는 마지막까지 국제 군사로서 마지막까지 여기서 피 흘리며 싸웠거든요. 이것을 우리 후세들이 많이 알아줬으면 합니다.
5. 조선의용대가 타이항산으로 이동한 이유
[해설]
일본군이 우한을 함락하자, 조선의용대는 중국의 그랜드캐년이라고 불리는 타이항산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인터뷰: 김태빈 / 한성여고 문학 교사]
선생님, 그런데 왜 조선의용대가 이 타이항산 지구로 이동을 했는지 그게 궁금하거든요.
[인터뷰: 김해양 / 김학철 선생 아들]
일부분은 중경(충칭)으로 가고 약산 김원봉이 직접 지휘하셔서 중경으로 가고
[인터뷰: 김해양 / 김학철 선생 아들]
그러니까 화북(화베이)에 있는 우리 조선 청년들을 흡수를 해서 부대를 늘리겠다.
[인터뷰: 김해양 / 김학철 선생 아들]
이것이 제일 중요한 목적이고 또 하나는 계속 일본군과 최전선에서 남아서 싸우겠다. 이 두 가지가 목적이죠.
[인터뷰: 김태빈 / 한성여고 문학 교사]
조선의용군 전적지 옛터라고 하는 표지판이 그래도 남아있네요. 1941년 1월에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바로 이곳에서 결성했다고 하고.
[인터뷰: 김태빈 / 한성여고 문학 교사]
조선의용대라는 표현도 그대로 썼고 그 조선의용대 중에서도 화북지대다 이렇게 했던 것 같고요. 조선의용대의 타이항산의 역사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된 것이니까 굉장히 의미가 있는 곳인 것 같습니다.
[해설]
조선의용대가 주둔했던 마을 입구에는 반가움을 넘어 감격스럽기까지 한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의용대가 우리말로 써 놓은 글씨.
총을 하늘을 향해 쏘시오.
일본군에 강제 징병돼 끌려온 조선 청년들에게 같은 민족을 죽이지 말라는 당부를 해 놓았습니다.
건물의 한쪽 벽에는 상관을 죽이고 조선의용대를 찾아오라는 글귀도 쓰여 있습니다.
언제 일본군과 교전할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품었던 동포애를 짐작할 수 있는 글귀들.
마을의 중국인들이 용맹한 조선의용대를 기리는 의미에서 새기고 또 새겨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렇게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한반도를 넘어 중국 대륙까지 삼키려는 일제
그들에 맞선 최정예 항일 독립군
숱한 역경에도 조국 독립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청년들
그들의 이름은 조선의용대!
그러나 해방 후 분단과 이념 대립의 비극 속에서
그들은 남에서도, 북에서도 잊히고 지워졌습니다.
중국 대륙에 남은 불굴의 항일 정신을 찾아 지금 출발합니다.
1. 조선의용대의 시작
중국 후베이 성의 성도 우한.
바로 이 도시에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아주 중요한 유적지가 있습니다.
[인터뷰: 김태빈 / 한성여고 문학 교사]
선생님. 저희들이 지금 아주 중요한 장소에 와 있습니다. 뒤로 보이는 곳이 1938년 10월 10일에 조선의용대가 창립된 장소에 저희들이 와 있는데요
[인터뷰: 김해양 / 김학철 선생 아들]
의용대가 창립했을 당시에는 여기가 대공중학교였거든요.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 신해혁명이 시작한 곳이거든요. 그러니까 의용대원들이 아마 그 의미를 따서 여기를 선택한 것 같아요.
2. 약산 김원봉 장군과 조선의용대의 결성
[인터뷰: 김태빈 / 한성여고 문학 교사]
약산 김원봉 장군은 1919년에 의열단을 만들어서 20년대 아주 꾸준히 의열투쟁을 이어왔고요. 1932년 난징에서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만들고 이것을 지도하기 위해서 1935년에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한 다음에 드디어 중일전쟁 시기에 이곳에서 조선의용대라는 군대를 조직했는데,
[인터뷰: 김해양 / 김학철 선생 아들]
처음 국민당 정부가 공식적으로 승인한 정규화 된 항일 무장대오가 탄생했다는 이것이 아주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3. 조선의용대의 구성원
[인터뷰: 김해양 / 김학철 선생 아들]
중국의 최고 군사 학부, 군사 학원인 황푸군관학교 여기를 졸업한 거의 백 명의 우리 민족 청년들이, 열혈 청년들이 모여서 그 백여 명, 그 외의 사람들까지 백여 명이 여기서 조선의용대를 구성했는데 사실 이 대부분 사람들이 군관이에요.
-군관이라는 말은 지금으로 하자면 장교.
-그렇죠. 장교
-일반 사병부대가 아니라 부대원 거의 대부분이 다 장교로 이루어진
-그렇죠. 전부가 장교예요.
4. 조선의용대의 활약
[해설]
이곳에서 창립된 조선의용대는 시시각각 대륙의 중앙부를 침략해 들어오는 일본군이 우한을 함락하기 직전까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용맹함을 떨쳤습니다.
[인터뷰: 김해양 / 김학철 선생 아들]
그 당시 일본군이 이 무한(우한)을 함락시키는 그 전야에 우리 의용대는 끝까지 잘 싸웠거든요.
[해설]
이역만리 중국 대륙의 한 가운데서 조국 독립을 실현하기 위해 창설된 정예 부대 조선의용대.
[인터뷰: 김해양 / 김학철 선생 아들]
우리 항일하려는 청년들이 여기서 피 끓는 투쟁을 하였고 또 이 무한(우한)이 함락되는 마지막까지 국제 군사로서 마지막까지 여기서 피 흘리며 싸웠거든요. 이것을 우리 후세들이 많이 알아줬으면 합니다.
5. 조선의용대가 타이항산으로 이동한 이유
[해설]
일본군이 우한을 함락하자, 조선의용대는 중국의 그랜드캐년이라고 불리는 타이항산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인터뷰: 김태빈 / 한성여고 문학 교사]
선생님, 그런데 왜 조선의용대가 이 타이항산 지구로 이동을 했는지 그게 궁금하거든요.
[인터뷰: 김해양 / 김학철 선생 아들]
일부분은 중경(충칭)으로 가고 약산 김원봉이 직접 지휘하셔서 중경으로 가고
[인터뷰: 김해양 / 김학철 선생 아들]
그러니까 화북(화베이)에 있는 우리 조선 청년들을 흡수를 해서 부대를 늘리겠다.
[인터뷰: 김해양 / 김학철 선생 아들]
이것이 제일 중요한 목적이고 또 하나는 계속 일본군과 최전선에서 남아서 싸우겠다. 이 두 가지가 목적이죠.
[인터뷰: 김태빈 / 한성여고 문학 교사]
조선의용군 전적지 옛터라고 하는 표지판이 그래도 남아있네요. 1941년 1월에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바로 이곳에서 결성했다고 하고.
[인터뷰: 김태빈 / 한성여고 문학 교사]
조선의용대라는 표현도 그대로 썼고 그 조선의용대 중에서도 화북지대다 이렇게 했던 것 같고요. 조선의용대의 타이항산의 역사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된 것이니까 굉장히 의미가 있는 곳인 것 같습니다.
[해설]
조선의용대가 주둔했던 마을 입구에는 반가움을 넘어 감격스럽기까지 한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의용대가 우리말로 써 놓은 글씨.
총을 하늘을 향해 쏘시오.
일본군에 강제 징병돼 끌려온 조선 청년들에게 같은 민족을 죽이지 말라는 당부를 해 놓았습니다.
건물의 한쪽 벽에는 상관을 죽이고 조선의용대를 찾아오라는 글귀도 쓰여 있습니다.
언제 일본군과 교전할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품었던 동포애를 짐작할 수 있는 글귀들.
마을의 중국인들이 용맹한 조선의용대를 기리는 의미에서 새기고 또 새겨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렇게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